제 11회 개인전 (2004. 2. 20- 4. 20. 부산시립미술관초대전)
풍경의 산수화, 산수의 풍경화
강 선 학( 미술평론가,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 )
화첩을 이용한 스케치로 화실에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사실성에 매달려 있거나 방법이나 도식적 그리기에 매여 있을 수 있다는 위험을 항상 견제하면서 야외와 실내작업의 균형을 잡으려 한다. 단연히 현장의 사실적 실재감과 현장감은 어떤 이념이나 방법보다 우선적이다. 그러다 보면 풍경이나 그리자고 산수화를 선택한 것인가 하는 회의를 물어오게 되고, 실내에서 자신의 감성에 따라 한국화의 전통적 이념에 충실하다 보면 어느 듯 손에 익은 관념화를 그리고 있다는데 대한 심한 회의에 부딪친다고 한다. 그의 이런 고백은 구상을 지향하는 다른 한국화가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고, 이 전시를 위해 만난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공통으로 듣게 되는 소리이다. 실재와 관념, 현실경과 산수 경 사이에서 그들의 설자리에 대한 갈등에 다르지 않은 물음이자 회의이다. 한국화라는 굴레가 주는 전통에의 안위와 실경이 주는 존재감의 현재성 사이에서 실경을 통한 전통적 미감과 이념적 동조감을 어떻게 살려가야 하는가 하는 점은 낡은 화두가 된 듯하지만 현대화의 심각한 부담에서 전통적 그리기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번안하고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나무와 한옥, 계곡의 물과 바위, 잡목 우거진 거칠고 다소 황량한 풍경이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장면은 우리 주변 어디에도 있고, 한옥의 구조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묘사라든가 항상 물을 앞세우고 구성하는 등 전통적 미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중에서 크게 눈에 띄는 것은 나무들이다. 수지법이라는 전통적 필법이 있지만 그는 그것을 새롭게 확립하려고 한다. 잡목의 가지로 뒤엉켜 있는 풍경은 마치 그것을 위해서인 양 종횡무진 거친 가지들로 뒤덮인 산하를 보여준다. 인간의 손이 덜 간 산하의 모습을 그는 나뭇가지로 대신해서 제시하려 하고, 전총 정신이 온존하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무에 나타나는 거칠고 단조로운 선들은 담채로 눌러 그 기세를 잡아주고 감성적 넘침을 견제한 가까이 보면 서로 얽힌 거친 숨결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나 적당하게 떨어져 보면 그 혼재가 하나의 형상으로 정리된다. 주로 방형을 선호하는 것도 담채법과 마찬가지로 화면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공간 때문인 것 같다.
풍경과 나무의 절충은 평범한 풍경과 심의적 풍경 사이의 고민을 낳는다. 일반적 풍경과 나무의 절충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는 무엇일까. 풍경화에 대한 거부감의 하나일까. 일반적 풍경의 대중적 이해와 작가의 심의적 해석 사이에서 그가 선택한 것, 작가의 해석이 덜 묻어나는 즉물성에 대한 거부인 것 같다. 그의 산행을 기록한 작품들에서는 장대한 산악 풍광이 잡혀지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한 시점으로 잡힌 풍경들이 주를 이룬다. 시점 이동이라는 동양화의 전형적 특징은 없고 도리어 원근법을 충실히 따르는 풍경적 시선이 강하다. 그러나 그 풍경들이 풍경이 아니라 산수로 여겨진다는 것이고, 그 산수는 풍경의 존재감이 아니라 심의성, 문기, 혹은 전통적 사의성을 일구어낸다는 것이다. 氣運生動이라 할 수 있는 “움직이고 살아 있는 기운을 성공적으로 창조”한 것이다. 서양 풍경화에서 흔히 읽게 되는 낭만주의적 성향이나 산수에서의 도가적 성향이 모두 내성적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낭만주의자가 병적으로 불건강한 영성에 자신을 가둬둘 수 있었던 반면, 도가는 고립되지 않은 일종의 고독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김문식의 작품에서는 이런 도가적 고독감을 보아낼 수 있는 것이다.
화첩으로 일차적 작품이 완성된 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다시 선택, 재 작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해석이 가미되게 되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는 자신의 그림 제목에 현장을 환기시키는 특정 지명을 붙이기를 꺼려한다. 현장 지명을 붙일 경우 현장성이 그림을 더 이상 확대시켜주지 않고 현장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상상의 한정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그림의 내용이나 형식미가 현장이라는 실재경의 확인으로 한정될 때 불특정 장소가 줄 수 있는 상상의 여지나 새로운 느낌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화가 줄 수 있는 정신성이나 문기, 혹은 감성적인 면이 실경이라는 제시에 의해 그 울림이 한정되는, 동양화에서 흔히 말하는 사의적인 이해를 막아버릴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이런 염려는 보는 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관념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산수라 하지만 옛 그림의 정신적 깊이를 나타내고자 할 때 실경은 언제나 부담이 되기 때문이고, 실경이 아닐 때의 그 도식적 모방의 혐의 또한 벗기 힘들다. 자칫 상투적 구호에 그치고 마는 그림일 수 있다는 이중 부담이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기법이나 관념적 표현에 빠지는 경우를 염려해서 현장으로 나돌고, 현장의 감각과 그 신선함을 가지려 하지만 실내작업의 관성의 위험이 상존한다는 말이다. 실내에서의 현장 스케치로 작업을 할 경우 자신의 심의를 싣는 데는 유리하지만 그 역시 관념화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작업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국화라는 전통과 현대라는 이중성이 만들어 놓은 구조적인 딜레마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