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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회 개인전 (2005. 6. 1- 6. 10. 선 화랑)

스스로 자연이 되는 그림

 

 이 재 언 ( 미술평론가 )

 온통 잿빛을 띤 하늘을 배경으로 한 심산유곡, 스산한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는 가운데 눈이라도 올 것 같은 화폭이 낯설다면 낯설다. 그러면서도 정겹다면 정겹다. 팔중 김문식의 화폭을 보노라면 [겨울청산도]의 시인 혜산 선정주의 “누가 겨울 숲이라 하여 가난하다 했는가.....”라는 탄식을 떠올린다. 모든 생명의 호흡과 온기들이 멎은 듯한 겨울의 산하를 이처럼 생동감 넘치고 호방하게 그려내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잎이 없다고 죽은 나무가 아니듯, 잿빛 화폭이라 하여 우울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필선과 힘찬 부벽준, 담담한 선염 등은 팔중 김문식의 산수화의 핵심이다. 최근 들어 더욱 색이 절제된 화면으로 잿빛의 선염만이 선들의 부유상태를 붙잡아주는 중력감을 주게 된다. 작가의 필선은 거칠고 투박한 선들로, 앙상한 겨울 참나무나 굴곡이 많은 소나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거친 필선들은 마치 추사의 서체를 연상시킬만한 기운생동 그 자체이다. 거대한 초대형 화폭에 분방하게 뿌리고 집어던진 듯한 필선들이 사의정신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분방한 선들에도 불구하고 그 선들의 변화무쌍한 기운과 리듬은 필경 자연의 전모를 환원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마치 얼기설기 모여진 나뭇가지들이 새 둥지를 이룬 것처럼, 분방하게 흐트러진 것 같은 선들은 의외로 있어야 할 자리에 온전히 놓여 있는 묘미가 있다. 역시 작가 산수화의 요체는‘자연’이다. 작가의 산수화는 자연의 복제가 아니다. 그림 그 자체가 자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니 그림 그 자체가 자연이 되게 하는 것이다. 작가의 자연에 대한 경험은 단순히 심산유곡에 대한 정취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있었기에, 겨울의 산수를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격조 높은 화면으로 일구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산수화는 동시대 미술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다양한 미의식과 다층적인 감수성들이 충돌하고 있는 미학적 혼돈은 더욱 자극적이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현실이 예술작품보다 더욱 박진감 넘친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일단의 예술은 치열하고도 처절한 현실, 시각 정보를 빙자한 잡다한 사물들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수묵 중심의 산수화가 고답적으로 보일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오늘의 상황은 보기에 따라 산수화에 우호적일 수도 있다는 견해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감각 중심으로만 치닫는 오늘의 예술적 상황 속에서 산수화의 미학이야말로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실제로 산수화는 인격도야를 위한 활동으로도 여전히 각광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이 산수화의 먼 미래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기껏 산수화의 가능성을 말할 때, 오늘의 시각 환경에서 흑백사진이 더 진지하게 느껴진다는 식의 감각적 차원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산수화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산수화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언어로 보는 데서 그 동시대적 가치가 발현될 것이다. 그렇다고 문자적 의미의 산이나 계곡 등의 소재만으로 자연의 의미를 한정해서는 곤란하다. 자연 대상을 그리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림 스스로가 자연이 되거나, 혹은 자연의 원형이 투영되는 것을 본질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산수화의 모습이 아니다. 사실‘자연’을 ‘자연’으로서 담지 못하고, 그것의 형상만이 묘사되거나 혹은 자연으로 가장하고자 하는 산수화가 많다는 것이 오늘의 산수화가 겪는 위기가 아닐까.

 

 팔중 김문식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현대에 대한 나갈 방향이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이제 낯선 기상천외의 새로움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새로움이란 기존의 양식이나 질서 안에서 자기 개성에 충실할 때 실현되는 것 아닐까. 겸제 정선의 위대함이 바로 산수를 전복시킨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 충실하고자 했던 소박함에 있지는 않을까. 김문식 산수화의 성취도 바로 이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수화는 여전히 가능한가. 우리는 아직도 이 화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부정해도 우리는 산수를 이상향으로 동일화시키고 있다. 이상향을 그린다 하여 나쁠 것도 없다. 우리의 감정구조와 산수화를 떼어 놓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분야의 활동이 다 그렇듯이 스스로 자기부정하는 반성이 절실한 때이다. 산수화 역시 ‘산수화가 아닌 산수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요구된다. 우리의 현대 한국화가 바로 이 점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서구적 방법의 답습에만 매달린 시행착오를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문득 필자는 작가의 그림을 보고 이런 추측을 해본다.“혹시 작가의 분방한 필선들이 바로 진지한 자기 부정의 몸짓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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