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회 개인전 (2008. 4. 16- 4. 25. 한벽원 갤러리)
(2008. 5. 3- 5. 15. 고암 이응로고택 禪미술관(수덕사))
물의 표정
김 백 균 (중앙대 한국화학과 교수 )
김문식의 산수화는 실경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필법을 개발 하면서 다양한 발전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싸리빗을 연상시키는 필선의 묘법 (평론가 오광수의 표현)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잡목이 많은 우리의 산의 느낌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업은 산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산의 맥을 그리고, 산의 바위를, 산의 냇물을 그리고, 산의 나무를 그린다. 산은 정형을 지니고 있다. 산은 형상은 그 다양한 표정으로 우리의 감정을 촉발한다. 작가 김문식이 지금까지 천착해왔던 과정은 바로 그 드러난 정형의 형상에 대한 탐구였다. 촌락과 가옥 밭이랑과 저멀리 돌아 사라지는 언덕길, 그러한 드러난 형상이 주는 서정. 어찌 보면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이러한 형상들은 그의 유년에 대한 그리움, 혹은 지친 서울생활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통하여 그는 새로운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비정형에 대한 발견이다. 이번 작품전의 주제는 물이다. 어느 산 속 깊은 곳에 흐르는 작은 냇물부터 소양강 댐과 대청댐이 쏟아 붓는 엄청난 양의 물까지 그의 작품에는 물의 표정이 담겨있다. 이자그마한 변화가 나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예술 그 순수의 세계에 한발 더 다가섰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산수화 형식을 보다 더 완결한 모습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물의 표현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됨을 자각했다고 말을 한다. 그말 뒤에는 이미 그가 물의 표현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단지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의 표정을 처리하는 능력이 곧 예술적 효과와 연결됨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 산수화에서 물은 그 자체로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물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는 산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물은 산의 생김새를 따라 그 표정을 만들어 낸다. 물은 비, 구름, 얼음, 개울, 폭포, 강, 호수, 바다로 모습을 바꾸어 간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을 연결한다. 물은 정해진 형상이 없고, 그것을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면 그의 작품에서 형식적 변화란 없다는 말이다. 산을 그리나 물을 그리나 드러난 모습은 둘 다 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이번 전시의 주제가 물이라는 말을 듣고 그의 작업세계가 보이는 형상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노자는 '최고의 이치는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나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스스로를 둔다. 따라서 도에 가깝다.' 라고 한다. 물의 특성중 가장 뚜렷한 것은 지속적으로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는 점이다. 사람의 길도 물의 길과 같다. 항상 겸손할 것을 물의 흐름은 말없이 설파한다. 물은 바위나 나무 따위를 지나칠 때, 힘으로 밀며 가지 않는다. 물은 자연스럽게 헤쳐 지나치는 지혜, 다투지 않고 물 흐르듯이 세상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는 무위자연의 지혜를 말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공자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자는 물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이는 물의 속성에서 만물의 이치를 배운다.
그의 산수는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물의 표정을 보여준다. 봄의 오는 깊은 시냇가 졸졸흐르는 물, 여름 장마의 수위 높은 댐 그 높은 곳에서 순간의 걸음으로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는 물, 가을 잎을 모두 내려놓은 잡목들 사이로 쓸쓸히 보이는 개울물, 겨울의 바위 뼈 드러낸 틈으로 얼어붙은 물까지 물의 표정은 다양하다. 모든 생명은 물의 순환처럼 왕성한 절정을 거쳐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비가 내려 냇물을 이루었던 물이 연못에 고이고 바다로 흘러들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듯이 자연의 생명도 순환의 구조 안에 있다. 생명을 얻은 것은 언젠가는 쇠락한다. 생명의 소생에 환희가 있다면, 생명의 쇠락에는 슬픔이 있다. 생명의 소생에 격정이 있다면, 생명의 쇠락에는 관조가 있다. 그리고 생명의 쇠락을 관조하는 시선에는 인생을 반성하는 철학이 있고, 명상이 있다. 김문식의 그림에는 바로 물이 지닌 순환의 원리와 그 원리를 통해 우리를 일깨우는 삶의 달관이 묻어있다. 먹빛에 묻어나는 그 싸리 빗의 소슬한 풍경과 가을의 적막과 여름의 포효가 고요와 함께 흐른다.
일찍이 그는 한국적인 서정을 찾아 산을 오르고 그 누구도 표현하지 않았던 아니 그 단순한 직설법의 문법으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싸리빗의 묘법을 반견하였다. 순지를 사용하는 그의 그림은 먹의 번짐이 선지보다 민감하지 않다. 농담의 변화도 적고, 순발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는 이러한 소박하고 직설적인 그러나 매우 한국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공간은 매우 효과적으로 자신이 발견한 서정을 전달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의 가치가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