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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개인전 (1989. 5. 18 - 24. 갤러리 인데코)

활달한 필력 돋보이는 수묵담채

 

申  恒  燮(미술평론가)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당연한 일이지만 예술적인 성취,  즉 이루어진 실체 속에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교결한 상(像)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예술적인 행위를 통해 나타난 실체에 실리지 않으면 그 가치는 인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행위의 결과를 일컬음이고, 그 가치 역시 행위의 소산인 까닭이다. 그러기에 예술가에게 있어 행위는 작가적 윤리성으로 규정된다. 김 문식의 경우 무엇보다도 작가적 윤리성에 투철하다는 점에서 신뢰감을 갖는다. 우선 10년 남짓 밖에 안 된 짧은 기간에 성취한 노력의 흔적치고는 과소평가할 수 없을 만큼 기초가 단단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앞으로 전개될 그의 예술 행로에 대해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작가적 윤리성에 투철하다는 사실은 만만치 않은 필력(筆力)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의 필력이란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형을 묘사할 수 있는 「손의 기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묘사력을 뒷받침하는「자신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그는 어느 면에서는 과(過)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 넘치는 필치로 상(像)을 결구(結構)하고 공간을 점유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칫 필묵의 기교가 넘쳐 심상(心象)이  흐트러지는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는 조바심이 들 정도이다.  그의 필법은 이미 고법(古法)의 예(禮)를 떠나 있다.  그만큼 자유롭고 활달하다. 물론 그림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필선으로 미루어 고법을 숙지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활달한 필선의 표정이 거기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작가적 의지의 한 표현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이러한 작가적 의지는 종래의 관념 산수 또는 이념산수를 따르지 않고 실사(實寫)를 통한 새로운 개념의 산수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로서도 이미 충분한 설명이 된다.  어느 면에서는 그의 그림을 산수화의 개념으로만 묶어 두려는 것조차 진부한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단순히 산수를 주제로 한 일반적인 산수화의 개념을 떠나 우리들 현실생활의 일상적 공간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까닭이다. 더구나 근작(近作)에서 볼 수 있듯이 여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에 따른, 일련의 실혐성 짙은 작업과 관련해 볼 때 고법여부는 하등 문제될 이유가 없다. 다만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새로운 실험을 빙자하여 수묵산수화 본연의 정신적 측면을 소홀히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 또한 그에 관한한 믿음을 가져도 좋다.  왜냐하면 실험성 짙은 작업 속에서도 전통성은 견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필법 운용이 자유롭고 또 구도가 파격적일지라도 그러한 자유로움과 실험적 요인들을 능히 제어할 수 있는 수묵화의 기본 정신이 굳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말의 우리는, 넘치는 자신감에 너무 이끌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필선으로 상징되는 운필의 자신감은 상대적으로 생각을 단절시킬 수도 있음을 중시해야 한다.  수묵산수화에서는 형용(形容)과 기세(氣勢)가 한 호흡 속에 실리지 못하면 상이 허약해지거나 전체적인 기운(氣韻)이 모자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 기교를 이끌어가고, 기교가 생각을 부추길 수 있어야만 안정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필선은 리듬이 약한 대신 직선적인 요인에 의한 방향성이 강조되고 있다. 방향성은 상을 이루기 위한 욕구로 나타난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직선적인 필선이 민첩하다는 점에서 볼 때 역시 상을 이루는데 제일의 목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민첩성은 앞서 말한 자신감에 연유한다.  한마디로 그는 묘사가 능숙하고 호흡이 빠른 대신 리듬이 약해 상이 다소 경직되어 있다. 그런데 근작에서는 리듬이 충분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호흡이 고르다.  급한 곳이 있는가 하면 느슨한 곳이 있다. 우선 필선에 호흡이 실리고 있다.  호흡이 실린 필선에서 리듬감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제 그는 모사(模寫)에 연연해하지 않는 자유와 해방의 참맛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대상을 보되 그 나름대로의 생각을 첨삭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즉 조형감각을 터득했다는 판단이다.  대상의 위치가 한결 자연스럽고 한가롭다.  불필요한 것들은 깊은 생각으로 밀어내거나 지워버린다.  실체의 이미지화라고 할 수 있는 간결함이 눈에 띤다.  이제 상을 생각 속에 붙들어 맬 수 있는 눈(眼目)을 얻었다는 느낌이다.  다만 직선적인 필선에 분명한 이유와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각이 깊어지면 강구되고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그에게 보다 필요한 것은 자연적인 시각 속에서 흐트러져있는 대상을, 화면 속에 함축시킬 수 있는 입의(立意)의 묘(妙)를 깨우치는 일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먹(墨)의 음영이라든가 먹의 유동성, 그리고 명암의 아름다운 배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그 오묘한 맛을 음미할 수 있는 눈을 갖추어야 한다.  수묵산수화는 자유자재한 필법 운용, 또는 현대적 감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전통성을 살리지 않고는 유현미(幽玄美)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가 근작에서 시도하고 있는 여백의 현대적인 해석도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을 떠날 수는 없다.  다행히 근작에서는 종래와는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는 자기적인 조형의지가 엿보이고 있다.  아직은 결과를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림 속에 긴장과 여유를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필의(筆意)를 터득한 것이 아니가 하는 반가움과 기대감이 앞선다. 직선위주에서 탈피하여 뭉쳤다가는 풀어지고, 내닫다가는 쉼이 있고, 긴장했다가는 이완되는 리듬이 크게 거스르지 않은 채 어우러지고 있다. 즉 상을 엮어나감에 있어 대상을 통해 심상을 완결 지은 뒤, 생각으로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운필에 리듬을 실음으로써 생명감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이제 서서히 골기(骨氣)가 형성되어가고, 기운(氣運)이 터를 잡아가고 있다. 스스로가 붓의 운용과 먹의 변화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랴.  넘치지 않게 적절히 사용하는 담채는 그림에 윤기를 보탠다. 더러는 채색이 거슬리는 일도 없지 않으나, 이 문제는 조만간 해결되리라고 본다.  적어도 붓을 놓기 전까지는 보여주려는 그림이 돼서는 안 된다.  감상자를 의식함으로써 그림은 불필요한 설명을 덧붙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손에 의지하지 않고 생각에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연계를 깊이 감상하고, 또 세심히 관찰하고 연구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작가적 관점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을 절제하고 의식을 열어놓음으로써 상이 마음속을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을 때 점ㆍ획 하나가 묵직한 힘으로 박힌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늘 그가 이룬 작품세계 속에서 작가적인 커다란 욕심을 본다. 이번 전시회는 그 하나만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난 번 전시회와 달라진 모습, 그것을 챙기는 일이야말로 이 시점에서 그에게 부과된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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