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회 개인전 (1993년 4월26일 - 5월2일. 대전 MBC문화공간)
김문식의 최근작품
朴 容淑 (동덕여대 교수ㆍ미술평론가)
자연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라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현대미술에서 자연이니 우연(偶然)이니 하는 말들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한동안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을 즐겨 했던 것도 그런 시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직 자연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가에 만족할 만한 해답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옛 조상이 오랜 세월을 자연 속에서 산수(山水)를 그토록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맥을 이어 그려 오지 않았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60년대 이후에 쏟아져 들어온 아방가르드 미술이 온 화단을 질풍노도처럼 휩쓸었고 현대미술이라는 그 위세에 한국화가 움추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그 외국바람도 점차 열기가 식어가고 더러는 식상해 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우리 민족이 자라온 토양과 주체 의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감하면서 재래의 우리 방식에도 관심과 눈을 돌려 볼 때가 아닌가 하고 자각케 한다. 김 문식 작품들도 일단은 자연을 보는 우리 재래적 혹은 전통적 관행에 맥을 잇고 있어 그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의 작품에 담고 있는 중요한 것은 자연을 보는 그리고 그 자연이 우리와 하나라는 대원칙에 있어서 재래적인 관행을 소홀히 하지 않고 착실하다는 점이다. 김 문식의 작품에서 오늘의 풍경들이 산수화적인 틀 안에서 관심을 두고 소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 점을 뒷받침한다.
가끔 수채화적인 맛이 가미한 풍경이 그려질 때도 그의 작품에선 어딘가 수묵의 냄새가 전체 분위기를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재래적인 관행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관행이 현대적인 공감대를 압도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제어하면서 공시적(共時的)이게 한다는 점이다. 수묵적이거나 채색적이지 않고 그 어느 편도 기울지 않는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한국화의 현대적인 해석에 의의를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묵염(墨染)을 펼쳐가는 묘미와 그리고 주저함이 없는 날카로운 선들로 구축되고 있다. 묵염의 강약과 그 번지는 미감을 적절하게 구사함으로서 자칫 설익어 보이는 듯한 복잡한 선묘(線描)적인 요인들을 감싸 안는다. 그의 선은 굵게 길게 가늘게 또 가늘고 짧게 나타나지만 대체적으로 선이 남발되는 듯한 이를테면 표현의 과욕을 보이는 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가 풍경을 단순히 재래적인 시각의 답습이 아니고 독창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색채를 아끼고 선을 아낀다 이 말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한다는 뜻이고 하나가 모두(一 卽多)이라는 독특한 우주철학의 반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은 되도록 묘사의 번거로움을 피했고 세 번 그어야할 선을 두 번 두 번 그어야할 선을 한번으로 요약했다. 그러기 위해선 대상(형태)을 꿰둘어 보는 직관력이 있어야 했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수묵을 덩어리로 이해하는 능력과 그것을 적절하게 화면에 배치하면서 선묘가 만들어낸 공간의 황량함을 수묵 특유의 무게를 짓눌러 줌으로써 그 모든 약점을 이겨낸다. 이것이 김문식의 야심적인 기법이고 풍경을 지나치게 현대화 하거나 반대로 재래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그렇게 보면 김문식의 작품에서도 면(面)의 의미는 소멸되어있다. 선과 묵의 덩어리가 결합되거나 배합되면서 형상 등이 전개되고 있다. 이 말은 자연을 완성된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진행되는 과정으로 본다는 뜻이다. 서양화가 면을 중요시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자연 등 완결된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연은 나와 상대하는 당당한 대상이다. 그러나 자연을 진행형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연은 어떤 경우든 나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나는 하나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면 보다는 묵을 덩어리로 이해하고 그것이 녹았다 굳었다하는 과정에서 형태가 명멸하게 된다. 이런 발생론적인 감각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있는 김 문식의 작품이 더욱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자연을 지나치게 시각적으로 규명하거나 공간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그 양쪽으로만 치닫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도리어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 도를 도라고 할 때 이미 도가 아니다 라고 노자(老子)가 말했다지만 이 경우도 그 양쪽을 선명하게 들어내면 화선지위에 있는 그림은 자연이 아니라 또 다란 허상(虛像)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꼴이 되고 만다. 중요한 것은 그 양쪽을 적절하게 견제하고 화목하게 만드는 화가의 솜씨일 것이다. 김문식은 먹의 덩어리를 그리고 다른 쪽에 선을 들고 있다. 이 양쪽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일은 무엇보다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원대한 시각 안에서 구사될 때 보다 훌륭한 작품이 제작되는 것이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