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회 개인전 (1995. 3. 29-4.4 도올 아트타운 신관 혜원 전시실)

자연의 정취를 담아내는 작업

(김문식의 수묵담채화의 세계)

 

윤   진  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최근 들어 한국화단에 수묵화의 기운이 다시 일고 있다. 그동안 채색화의 물결에 가려서 제빛을 내지 못하던 수묵화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어떤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면 거기에 편승하여 화단이 특정양식으로 몰리기 일쑤인 것이 우리의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한국화의 경우도 이러한 관례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특히 90년대 들어와 우리 화단이 이러한 구태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추상과 구상, 채색과 수묵 따위가 상호간에 어떤 우열의 법칙이나 위계질서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취향이나 신념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추구해야할 대상이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90년대 미술의 분명한 성과 가운데 하나라면 바로 이와 같은 창작의 자율성과 표현의 풍요로움을 꼽을 수 있다.

 

  김문식의 한국화 분야에서 일찍부터 수묵화의 영역을 고집스레 지켜온 몇몇 작가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현재 40대 중반에 이른 동료 중견작가들과 함께 말하는 채색화의 도도한 물결을 헤치고 수묵화 고유의 맛과 품격을 유지해 왔다. 물론 이와 같은 나의 발언은 거꾸로 이야기할 때 수묵화가 채색화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고 기법이나 재료를 초월하여 좋은 작품은 논의될 수밖에 없다는 점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질과 격을 높이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김문식의 수묵작업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리라 본다.

 

  작품을 통해 김문식이 즐겨 다루는 소재는 자연이다. 자연을 다루되 그가 그리는 자연은 끝이 뾰족한 험산준령이 아니라 말 그대로 펑퍼짐한 우리의 산야이다. 그것은 우렁찬 장년기 지형에서 볼 수 있는 찌를 듯한 기세가 아니라 닳고 닳아 밋밋해진 준평원기 지형 특유의 달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가 즐겨 화폭에 옮기는 산야의 모습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상 보아오던 풍광들로서 유달리 친숙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명소가 아니라는 점에서 익명적이다. 그는 마음씨 착한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고 포근한 우리의 산천을 특유의 날카로운 선묘와 서늘한 문기로 화폭에 담아낸다. 그의 그림에서 맡을    수 있는 이 특유의 정서는 문학에 비유하자면 김유정의 '봄 봄'의 정취나 비갠 뒤뜨락에 떨어진 복사꽃을 쓸려는 아이를 나무라는 선비의 여우를 담은 옛시조의 뒷맛과 같다. 그것은 개운한 맛이다. 그것은 서양재료인 아크릴이나 유화물감이 주는 텁텁한 맛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의 그림이 풍기는 어찌 보면 싸늘하면서도 대쪽같은 분위기의 진원지는 창대처럼 날카로운 삐침의 묘법과 화선지위에 번지는 선염의 효과다. 수묵담채로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대개가 복잡한 도시가 아닌 한가한 농촌 풍경이나 이름 없는 산야의 한 부분을 담고 있는데, 그러한 대상을 담아내는 틀 자체가 심심한 것 또한 특징이라면 특징이랄 수 있다. 이를테면 시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까닭도 이 시점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들은 작가가 한가한 걸음으로 여행하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서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그린 것이다. 그는 역동적인 구도를 취하려고 산꼭대기에서 계곡아래를 굽어보거나 까마득한 절벽을 올려다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들은 대개 길 위에서 멈추고  그리거나 아니면 밭고랑을 타고 앉아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평원법으로 되어있다. 평원법의 구도는 역동적인 느낌은 주지 못하지만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평범하다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친근한 느낌과 완상의 아름다움을 준다.  이는 분명 김문식 수묵화의 가장 그 다운 맛이다.  깔깔한 느낌의 갈필로 묘사된 수묵과 엷게 입힌 담채는 계절의 특징과 정취를 잘 드러내고 있다.

 

   김문식의 수묵화는 그 기법이나 내용면에서 한결 세련되고 틀 잡힌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오로지 주변의 흐름에 눈길을 주지 않고  꾸준히 자기세계를 가꿔 온 노력의 결과라고 믿는다. 우리의 정취를 먹과 담채로 담아내는 그의 작업이 확고한 자기 언어로 정립될 날을  기대해 본다.     

김문식-과수원의한겨울-1995-O14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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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산설-1995-O14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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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겨울산소나무길-1995-O14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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